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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Eng.

 

PARK JUNGSUN

 

<티벳의 봉우리들>시리즈에 부쳐



<도 입>

박정선은 그동안 몇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서 에나멜의 물질성을 연구하였고, 그 가운데에서도 물질의 팽창 혹은 그 자취의 이미지와 중력에 의하여 부풀어 오르는 기이한 현상을 빗대어 <생명에너지 시리즈>라 명명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미묘한 에네르기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많은 실험적인 화가들이 단순히 2차원의 회화를 이탈하여 3차원적인 회화를 구가하는 방향과는 사뭇 다른 물성과 프로세스를 적용하여 색다른 과정의 연출을 합리화하는 <과정의 예술>이자 <시간의 고착화> 혹은 <현상의 고착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획득된 <현상학적 회화>였다.


<생명에너지>에 이어서 그는 우주의 광활한 공간을 배경으로 방랑하는 자신의 모습 혹은 현대인의 모습을 실루엣으로 처리하여, 고독한 시대의 처절한 삶의 모습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특정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하여 자신이 제작하여야할 그림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근자에 이르러, 여러 가지의 실험과 고뇌 끝에 현시대의 인류가 껴안고 있는 문제들을 담고 있는 시대적 이미지들을 표출하되,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을 강화하고 여기에 더하여 힘찬 에네르기를 동반하거나 회화성이 강하게 녹아 있는 <티벳의 봉우리들>시리즈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리즈에서 현대의 도시를 장악하고 있으며 물질문명을 강하게 상징하는 마천루의 모습을 기암괴석이나 절벽이 있는 봉우리들 혹은 그와 유사한 독특한 풍경의 이미지로 화하여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과정은 9.11 테러 이후에 인류가 안고 있는 물질문명과 가치관에 대한 문제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절규하는 빌딩들>

이러한 작품들에는 단순히 배경과 주제만이 존재하는 이원적 레퍼토리를 구사하여 단순한 동양화적인 화풍을 구사하는 듯하기도 하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해체주의적 자화상이나 인체의 모습에서 오는 처절하고도 강렬한 메시지가 강하게 녹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대인의 절규이자 증오감의 표출이며, 문명 파괴론자들에 대한 무언의 항의이기도 하다. 작가는 빌딩을 산수화 혹은 산 그 자체와 합성하여 관객들을 현혹시키지만, 첫눈에 그것이 단순한 산이나 빌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래서 <Broad Peak 8047>이나, <K2 8611>의 경우는 빌딩에 가까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Kangchenjunga 8586>, <Cho oyu 8201>의 경우는 산의 이미지에 가까우며, <Makalu 8463>과 <Shar>의 경우는 산수화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Shisha Pangma 8012>의 경우는 남근석처럼 보이기도 하고 <Sherpa 1>과 <Sherpa 2>의 경우는 절규하는 인간의 애절함이 담겨 있다. <Crevasse 1>과 <Crevasse 2>의 경우는 엄청나게 험준한 산악지대의 절벽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트로크>

작가는 단순히 질료를 캔버스위에 드리핑하기도 하고 스트로크로 처리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힘차게 특정한 방향으로 터치가 이루어지는 방향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따금씩 거대한 에너지의 총체가 되어 관객들의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그것은 히말라야의 산맥에서 보이는 장엄한 산악지대로 관객들을 유도한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어떤 특정한 하나의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암울한 배경과 어우러져 한편으로는 현대인의 모습 혹은 현대인의 주거환경을 드러내어 냉엄하고도 무시무시한 도시의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고, 산수화의 특성을 이어받아 해맑은 분위기가 드러나는 연하장의 모습과도 같은 특성이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성가운데에서도 대략 3가지의 유형의 작품들로 분류가 이루어지는데, 사용하는 기법이나 색상 혹은 소재적 측면이 각각 다른 지향점을 향하여 작품이 제작되어 있으며, 그것은 또다시 한 지점으로 모이기도 하고, 다시 세분화되어 다른 방식의 표현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으로 미루어 볼 때, 각각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는 풍경화의 일면을 지니되 때로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불길하게 바라보기도 하는 긍정과 부정의 이원적 속성을 강하게 지녀서 앰비발란트적인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이 아니라 시리즈를 다루는 과정에서 즉, 여러 작품들이 드러내는 메시지에서 그러하다.


 

<색상>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채색방식이나 배경의 처리가 각각 다르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배경이 전혀 무시되어 있거나, 배경이 있되 전혀 변화가 없는 어두운 색에 보일 듯 말듯하게 달 혹은 해의 원이 묘사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산수화처럼 묘사하여, 한국적 서정성을 강하게 표출하면서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성격을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화면의 전체를 노란색으로 표출하면서 강하게 마티에르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또한 부분적으로 배경이 묘사되어 전체적으로는 백색의 배경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작품을 유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품들을 일관성 있게 이끌어가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작가가 드러내고자하는 한국적인 서정성을 세계화하여 특징적인 양식을 구축하고자하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래서 화면에 여백과 같은 빈 공간을 설정하기도 하고 여백이 아닐 경우에는 단순한 배경을 사용하여 주제에서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Goal>

일견 작품들은 매우 색다르면서도 같은 지점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고찰해보면 이러한 작품들이 각각의 지향점이 매우 다르며, 그것이 현시대의 각각의 인간이 처해있는 모습을 우수적으로 이중화하여 표출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다른 이미지들로 표출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모든 히말라야 산맥의 이미지들을 차례로 표현하고 싶은가 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하나를 다 그려내어 표출해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개성을 존중하고 각각의 인격을 고려해서 인간이 처해있는 고통이 각각 다르며,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작가는 최종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서 자신의 회화의 시발점을 미묘하게 이끌어 가고 있는데, 그것은 화가로서의 데뷔시절부터 고민하였던, 자아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내느냐에서 벗어나 자신을 비우고 자연으로 한검을 나아가서 사물화하거나, 타자화 하여 보다 색다른 연출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양 혹은 한국의 회화에서 지향해온 가치관으로 자신의 작업을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서구의 물질주의적 혹은 배타주의적 사고관에 경고를 가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종교적인 갈등이나 문명의 격차에서 오는 다양한 시각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의 상생을 구가하고자 하는 염원에 자신의 화풍을 맞기는 경우라 할 수 있다.


<티벳의 봉우리들>은 결국 하나의 우리시대의 허상이자 기호이며, 현실의 이미지를 대체하는 기표이기도 하다. 각각의 봉우리들은 결국 각각의 나라이며, 각각의 색상들은 각각의 인종이기도 하다. 그것은 백색, 흑색, 황색을 지칭하여 서로간의 문제가 무엇인가, 각각의 염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왜 우리들은 티벳의 봉우리들처럼 의연하게 그리고 당당하세 서 있을 수 없을까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9월



박기웅(미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