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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 Eng.

 

PARK JUNGSUN

 

박정선의 드리핑 회화

욕망을 숨기면서 드러내기, 그리고 가장하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변형된 욕망-의식 바깥의 주체. 박정선이 자신의 근작에 부친 주제다. 욕망, 의식, 주체를 아우르고 있는 이 주제는 한눈에도, 혹은 다소간 정신분석학적이다.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의 지점들이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고 있음을 말해주며, 최소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어느 정도 이런 정신분석학적인 개념들의 재현적이거나 암시적인 외화 내지는 표상형식으로 볼 수 있겠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 자기를 실현하려는 본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성은 대개 제도에 의해 억압된다. 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욕망은 제도가 그어놓은 금(금지와 터부)을 위반하는 행위(일탈)이며, 나아가 제도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해서 모든 정상적인 제도는 이렇듯 자기를 실현하려는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통어한다. 그런데 욕망은 억압한다고 없어지지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실현하는 계기를 찾아내고야마는데, 이렇게 찾아진 욕망이 변형된 욕망이다. 욕망 자체를 실현할 길이 없으니, 우회적으로, 변형된 루트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 욕망이 아닌 양 하거나(제도를 속이는) 적어도 위험하지는 않은 양(욕망의 수위를 조절하는) 자기를 가장하는데, 그렇게 가장된 욕망이 전이(전이된 욕망)다. 해서 욕망은 이중적이다. 욕망 자체는 그렇지가 않지만, 욕망을 가장하는 과정에서, 욕망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이중적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욕망은 이중적이고, 변형된 형태로 은폐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욕망이 숨어드는 곳이 무의식이다. 제도에 의해 억압된 욕망이 의식의 지층으로부터 무의식의 지층으로 추방되는 것이다. 주제에 나타난 의식 바깥의 주체란 바로 이처럼 무의식으로 숨어든 주체, 무의식적 주체, 변형된 욕망을 내재하고 있는 주체다. 주체는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분화된다. 의식적 주체는 제도와 사회에 내어준 나(페르소나 즉 자기를 가장하는 가면)를 말하며, 무의식적 주체는 제도와 사회로부터 추방된 나(가면 뒤에 숨겨진 나)를 지칭한다. 이로써 <변형된 욕망-의식 바깥의 주체>란 주제는 욕망 자체와 전이(가장)된 욕망,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분열되고 중첩된 주체의 이중성을, 그리고 그로부터 유래한 긴장감과 존재의 불안정성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존재의 불안정성은 작가의 경계를 넘어 현대인의 보편적인 초상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주체의 이중성을, 존재의 불안정성을 어떻게 조형하는가. 작가의 그림에는 부처와 연꽃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여러 경우의 욕망의 지표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가장 흔한 경우로서 여체 같은 성적인 욕망의 지표들, 모나리자 같은 미술사적인 욕망의 지표들(모나리자 그림이 여러 경로로 패러디되고 특히 오마주의 대상으로서 등극한 점이 그 증거일 것), 다이애나 비나 히치콕 감독과 같은 스타의식을 자극하는 대중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욕망의 지표들이다. 나아가 작가의 주제의식과 관련해볼 때, 부처와 연꽃마저도 일종의 종교적인 욕망의 지표의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문제는 대상 자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 어떤 문맥 속에 배치되는가를 살피는 일이며, 따라서 그 의미마저도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결국 대상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대상의 고유한 성질에 속한다기보다는 그 대상이 놓여지는 방식 곧 문맥인 것).

이렇게 소재를 열거하는 과정에서 좀 특이한 사실이 발견된다. 주제의식으로 봐서 분명 주체를 의식하고 있는 그림인데, 적어도 외관상 그림 어디에도 작가는 없다(물론 작가의 개인사를 소재로 한 일부 다른 그림들이 없지는 않지만). 작가의 주체는 그림의 표면에 드러나 있다기보다는 그림의 이면에 암시적인 형태로 잠재돼 있고 은폐되어져 있는 것이다. 즉 그림에 나타난 욕망의 지표들은 다름 아닌 작가가 욕망하는 지표들이며, 작가의 무의식적 주체의 레이더에 붙잡힌 지표들이며, 작가의 무의식적 주체를 대리하고 표상하는 지표들이다(욕망은 결코 의식의 표층 위로 나와질 수는 없다. 적어도 욕망 자체로는. 변형된 형태라면 모를까). 그림에서 작가의 주체는 이렇듯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인 주체로 나타나고, 특히 욕망하는 주체로서 현상한다. 그리고 욕망하는 주체는 타자들의 집합으로서 구조화된다. 욕망한다는 것은 곧 타자들을 욕망한다는 것이며, 그 타자들을 향한 욕망이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주체는 타자들의 집합으로서 채워진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그리고 우연한 타자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된 주체에의 인식 내지는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작가는 주로 인터넷이나 잡지 등 일상적인 대중매체로부터 이 욕망의 기호들, 욕망의 이미지들을 발췌하고 변형하고 재구성한다. 최초 발췌한 이미지들을 O.H.P 필름 등 매개 장치를 이용해 변형하고 재구성하는데, 이로써 이미지는 대개 명과 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최소한의 2도 화면으로 축약된다(더러 하프톤을 위해 3도 화면까지 세분화하기도 하지만). 일체의 세부가 생략되면서 재현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가 추상적이고 양식화된 이미지, 기호화된 이미지로 변질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미지는 특히 구체적인 현실성을 상실한 채 한갓 익명적인 이미지, 중성적인 이미지, 좀 더 과장시켜 말하자면 출처불명의 이미지로 탈바꿈한다. 이를테면 부처와 연꽃, 다이애나 비와 히치콕, 그리고 모나리자 등 이미 그 이미지의 실체가 상당할 정도로까지 선입견의 형태로 각인된 경우가 아니라면(이 경우에마저도 우리가 그 대상을 알아보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의 정보를, 기호를 알아보는 것), 이미지의 실체는 종잡을 수가 없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여체의 경우 그것이 여체라는 최소한의 정보 말고는 아무 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다. 심지어 그 이미지들을 최초 겨냥했던 욕망의 대상성, 성적 대상성마저도 모호해진다.

이로써 변형된 욕망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욕망을 변형된 욕망으로 덮씌우고, 성적 대상을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내용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대상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욕망 자체가 직접적으로 노출되어졌을 때 있을 법한 억압의 계기를 피하는 것이며, 따라서 욕망이 이중적인 구조를 띠는 이유마저도 덩달아 설명이 된다. 욕망을 숨기면서 드러내기. 욕망을 억압하면서 실현하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욕망을 가장하기. 나아가 욕망에 대한 일정한 자기검열을, 욕망을 스스로 검열하는 심리적인 기제 혹은 메커니즘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작가의 독특한 화법으로서 일종의 드리핑 기법이 있다. 작가는 특이하게도 보통의 안료 대신 에나멜이나 래커 페인트의 점성을 이용한 드리핑 기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드리핑 기법으로 널리 알려진 잭슨 폴록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기법에 의한 그림은 다소간 자동기술법과 우연성에 착안한 것이며(그 자체가 일정정도 무의식에 연동된), 재현적인 그림보다는 추상적인 그림에 어울린다(실제로 작가의 그림 중 어떤 배경화면은 폴록을 연상시킨다). 드리핑 기법으로 화면을 조성한 연후에 일종의 공판법(뚫어진 구멍 사이로 안료를 흘려보내는)을 이용해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판법을 도입했다고는 하나, 이로 인한 이미지 역시 그저 찍어내는 대신 드리핑 기법을 적용한 것이어서 배경화면과 모티브의 관계는 생각만큼 뚜렷하게 구분되지가 않는다. 구분은커녕 그림에 따라선 오히려 모호한 경우마저 없지 않은데, 이를테면 드리핑이 만들어낸 궤적이 모티브의 구획된 경계를 넘어 배경화면과 모티브를 가름하는 가장자리 선을 지울 때가 그렇다. 다시 한번 욕망의 기호가, 그 실체가, 그 대상성이 모호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욕망의 대상성은 이중 삼중으로 변형되고 은폐된다(무의식의, 자기검열의 집요함이란!).

그런가하면 드리핑 기법에 의한 화면이 자동 기술적이고 우연적이라고는 했지만, 그리고 재현적인 경우보다는 추상적인 그림에 어울린다고는 했지만 철저하게 그렇지는 않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무의식적인 과정에 일정정도의 의식적인 과정이 매개되고 간섭되기 마련인 것이며, 추상적인 그림 역시 보기에 따라선 어떤 구상성을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다(잭슨 폴록의 그림이 추상적인 그림이면서 동시에 북미대륙의 원시적인 풍경, 원초적인 풍경을 암시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드리핑 기법을 진행하다보면, 어느 순간 풍경이 암시된다. 그저 무분별하게만 보이는 흔적의 궤적 사이로 낮은 구릉이 보이고, 저 멀리 지평선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종의 우연적인 풍경 내지는 암시적인 풍경이라고 부를 만한 그 풍경 위에 작가는 특정의 모티브를 아크릴로 그려 넣는데, 대개는 자신의 가족사 내지는 개인사와 관련한 서사적이고 일화적인 모티브를 그려 넣는다.

이를테면 가족사진의 특정 부분을 발췌해 변형시키는데, 대개는 흑백의 모노톤으로 변형된 그 이미지가 드리핑으로 조성된 우연적이고 암시적인 풍경과 어우러져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기묘하고 풍부한 정서적 효과를 자아낸다. 일말의 비현실성과 함께 마치 과거 속의 한 사건을 현재시제 속으로 되불러온 것 같은, 향수를 자아내는, 아득하고 아련한 감정에 빠져들게 한다. 여러 면에서 작가의 다른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이 일련의 그림들이 향후 작가의 회화적 지평을 확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